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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관계다 / 짐 푸트먼 / 김태곤 옮김 / 생명의말씀사

샤마임 2018.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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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관계다

짐 푸트먼 / 김태곤 옮김 / 생명의말씀사


관계 없이 교회는 없다. 




  
저자/역자 : 짐 푸트먼/김태곤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판매가 : 14,000원 → 12,600원 (10.0%, 1,400↓)
진실한 관계 안에서 사랑을 배우지 않는다면교회에 갈 수는 있어도 교회가 될 수는 없다!“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 꼭 교회에 나가야 하나요?”“예배만 잘 드리면 되지, 꼭 소그룹에 참석해야 하나요?”“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는데 왜 힘들까요?”‘나와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며 교회를 떠나거나, 예배만 출석할 뿐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사람들의 마음이 교회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것은정말 신자들의 모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일까,아니면 그 모임에 실망해서일까?스타 목사, 크고 좋은 예배당, 매력적인 프로그램……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더보기▶]






가나안 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가나안 교인이라는 말, 참 아픈 단어이다. 십여 년 전, 가나안 교인이라는 단어가 생소할 시절, 사람들은 가나안 교인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에 사람들은 자신이 가나안 교인이라고 서슴없이 소개한다. 가나안 교인은 교회를 안나가라는 말을 바꾸어 사용한 것이다. 가나안 교인의 특징은 먼저 그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완전히 버리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한 수긍도 아니다. 두 번째 특징은 교회에 크게 실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 톰 레이더 박사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7가지 이유를 발표하면서 슬프게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일반적인 일이 됐다. 그러나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 중 일부는 한때 가장 신실한 교인들이었다고 말했다. 즉 그들이 교회는 떠나는 이유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교회 안에서 일어나 모순과 상처로 인해 떠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안에도 이제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가나안 교인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는 가나안 교인 현상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온 오래된 질문이 하나 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가 가장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교회가 이단들로 분열이 일어나자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Extra ecclesiam nulla salus(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만약 키프리아누스 혼자만의 주장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초대교회 내내 이어간다. 히포의 어거스틴,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등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한 이유에는 도나투스파와 같은 이단들이 교회 분열을 조장하고 심각하게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키프리아아누스의 주장은 현대인들이 듣기에 거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질문에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 그것은 교회란 무엇인가?’이다. 몇 가지로 요약해 보자. 먼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둘째,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셋째, 교회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이다. 세 개의 정의는 교회가 가지는 조직신학적이며 성경적인 답변이다. 만약 그렇다면 가나안 교인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간다.




가나안 교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존재한다. 먼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각 개인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밖에 있을 수 없다. 둘째, 건물이나 가시적 모임이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가나안 교인이 될 수 없다. 셋째, 교리적으로 그들은 구원을 이미 받았다. 교리적이라 함은 불가항력적 은혜를 포함한 성도의 견인에 의존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말한다. 이 부분은 많은 논쟁을 가져올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가 진정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면 결코 구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교인은 존재한다. 왜 그럴까?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들은 올바른 교제가 없는 교회 안에서 바르지 않는 신앙관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올바른 교제가 없는은 가나인 교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함으로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인류사회의 공동체성,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사랑과 생명의 교제의 근거이시다.’라고 말한다. 또한 제20[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2.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가 되신다(412, 144). 이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에 배치되는 어떤 것에서나 혹은 믿음과 예배에 관한 인간적인 교리와 계명에서 벗어날 자유를 양심에 주셨다(419, 529, 고전 723, 238­10, 고후 124, 159). 따라서 그와 같은 교리를 믿거나 그와 같은 명령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위반하는 것이다(220­23, 110, 51, 24­5, 51). 그리고 맹신을 강요하거나 절대적이고 맹목적 복종은 양심과 이성을 파멸시키는 것이다(1017, 1423, 820, 1711, 422, 511, 1312, 16­17, 89).]


이것은 단지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교단만의 교리가 아니다. 모든 신자는 자신이 스스로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스스로 양심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책임은 엄밀하게 담임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멈추고 다시 교회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교회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다시 앞선 대답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진정 교회는 성도 자신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이렇게 정의되는 것으로 완전할까? 아니다. 성경은 교회라고 말을 할 때, 한 몸이라고 하시고, 지체라고 하신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교회는 한 개인으로 만족할 수 없으며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두 사람 이상이 모여야 정상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관계다라고 말한다면 교회의 존재방식에 대한 정의인 셈이다.


짐 푸트먼의 <교회는 관계다>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관계적 측면에서 알려 준다. ‘신앙생활, 혼자서도 가능할까?’라는 표지 문구는 현대 교회가 고민해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원제는 ‘The Power of Together’이다. 한국어 제목은 원제를 의역한 것이다. 그러나 본서가 가진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진정한 교회는 관계다.’ 관계가 상실된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교회는 나가지만, 모임에는 참석하지만, 관계가 없다면 그는 바른 교회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가나안 교인들에게도 동일한 구속력을 가진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교회란 무엇인가? 짐 푸트먼은 교회란 무엇인가?’대한 오래되고도 현대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이미 답이 있음에도 답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그 답이 충분히 적용되지 않았고,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찾아 떠나는 저자의 여행을 따라가 보자.



우리는 세상 속에 산다. 또한 우리는 타락했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결함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자신에게 결함이 있다고 보지 않고 기독교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17)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 총명하고 부지런한 사람, 교회 일에 열심이거나 열심히 없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다. 신실해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부정을 행하고 죄에 탐닉한다.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쉽게 죄에 빠진다. 저자는 이것을 실제적인 관계로 표현한다. ‘실제적인 관계가 빠지면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한 레시피에 결함이 생기고 자연해 해로운 결과가 따른다’(23)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혼자만의 개인 신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교제를 통해 서로 힘을 얻고 위안을 얻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은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최초의 교회는 가정이었고, 하나님은 홀로 독처하는 것을 결코 좋게 여기지 않았다. 돕는 배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완성된 가정, 교회를 이루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다툼과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교회 안에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의인이 있는가? 모든 일에 이타적인 사람이 있는가? 없다. 바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는 불가피하게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화약고처럼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76)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 단지 세례 받고 교회 다니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79) 사랑을 전제로 한 관계 속에서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고, 온전한 삶의 균형을 가질 수 있다.


진정한 관계를 막는 걸림돌은 교만이다. 가나안 교인 현상의 기저에는 교만이 자리한다. 이 교만은 담임목사들에게 가장 많고, 당회와 일반 교인들에게도 적지 않다. 또한 교회를 떠나는 교인 자신에게도 있다. 모든 가나안 교인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적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교회를 찾는다. 그들은 의외로 까다롭고 예민하다. 심지어 교만하기까지 하여 어느 교회도 가도 성에 차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이 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교회의 입장에서도 그런 성도를 온유함으로 받지 못하고 내치거나 비판하는 것은 결코 목사로서 옳은 행위는 아니다. 목사는 성도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관계가 깨지면 신앙도 흔들리고, 마음도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고 교회가 관계를 가진다는 의미 안에는 제자 삼음과 제자 됨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제자는 삼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제자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제자가 되려면 누군가의 영적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 참된 제자화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관계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관계적이 되는 법을 배운다.”(158)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제자 삼는다는 것은 제자가 되고 있다는 것.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제자를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이시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제자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면서 도움을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지 않는 것은 결코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손만 벌리는 것도 옳지 않다. 6:2은 우리에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충고한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일까? 사랑의 법이요, 교제이며, 한 몸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10장에서 친교가 곧 예배라고 선언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과제인 동시에 성도 간의 교제이다. 또한 삶도 예배이다. 바울은 분명히 우리의 몸,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이 되며,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12:1)라고 말한다. 마지막 11장은 목사인 나에게 적지 않은 충고를 준다. 깊은 관계로 나아가라 한다. 서로 헌신하며 사랑하는 충고는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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