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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고전읽기]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샤마임 2017. 10. 26.

[기독교 고전 읽기]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이 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객관적 관점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객관적 관점은 사실에 근거한 기계론적 인간 해석에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결론만 두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한 심리와 상황들 속에서 뭔가를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그 사람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정황 또는 삶이 맥락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부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키프리아누스는 매우 독특한 입지를 가진 교부입니다. 지독한 박해가 한창이던 초대교회는 정통성을 헤치는 이단들이 폭도처럼 교회를 약탈하고 있었고, 박해로 인한 배교로 인해 배교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로 적지 않은 소란 속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란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지만, 심각하게 교회가 대립하거나 논쟁 속에 휘말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로마제국에 위협이 될 만큼 성장하고, 다양한 교회들이 제각각 판단을 하게 되면서 교회들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교부 문헌을 접할 때, 단순히 책의 내용이나 그들의 신학 사상만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주장이나 규칙, 문헌들은 후대 교회의 방향과 흐름을 지배하는 주춧돌이자 디딤돌과 같기 때문입니다. 키프리아누스는 가톨릭교회 일치를 주장함으로 중세 교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신학적 이론을 닦은 교부입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천주교의 가톨릭과는 사뭇 다른 교회관을 견지(見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분도출판사의 치쁘리아누스의 <치쁘리아누스 도나뚜스에게, 가톨릭 교회 일치, 주의 기도문>을 살펴볼 것입니다. 치쁘리아누스가 아닌 부드러운 키프리아누스로 수정해 부릅니다. 지명이나 성경 등도 개신교적 성향에 맞게 수정해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1. 생애

치쁘리아노, 치쁘라아누스, 키프리아누스, 키프리안 등 비슷하지만 다양한 이름을 가진 교부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름은 여러 언어로 번역하다고, 일치된 이름을 정하지 않아 일어나는 현상인듯합니다. 어거스틴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라틴식 이름이 있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특이한 인물입니다. 그의 정식 이름은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입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주후 3세기 중엽에 활동한 서방 교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부입니다. 그는 200-210년경 유복한 이교 집안에서 태어나 258년 발레리아누스 화에 치하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던 그는 일반 고등교육을 마쳤고, 법률가이며 교사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수사학에 능통해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즈음에 속세의 불의와 부피에 크게 실망하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246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249년 카르타고 주교가 됩니다. 그는 십 년 뒤인 248년 순교를 당하기까지 뜨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그가 가진 대부분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신은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키프리아누스는 백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주교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경쟁자였던 노바투스와 그를 따르는 감독들에 의해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주교가 된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됩니다. 데시우스 황제의 핍박은 가장 지독한 박해 중 하나로 기록될 만큼 잔인하게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목숨을 앗아간 네로 황제처럼 로마의 옛 정신을 다시 세워야 한다며 모든 총독들에게 칙령을 내려 기독교 박해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이교 정신에 투철하여 로마가 어렵게 된 이유를 기독교 때문으로 보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몰살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는 날짜를 정해 신전에 제사를 지낸 사람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해 기독교인들을 색출했습니다.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돈으로 증명서를 사야 했습니다. 돈이 없어 증명서를 사지 못하면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와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오리겐과 로마 감독 파비안, 안디옥 감독 바빌라스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는 교인들의 강청에 몇 개월간 피신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교를 잃은 로마 감독들은 키프리아누스에게 편지를 써서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이것이 키프리아누스의 13통의 <서간집입니다.


키프리아누스가 교회로 다시 돌아왔을 때 교회는 난해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당시 교인들은 세 종류로 분류되었습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순교자, 감옥에 갇혀 있다 풀려난 고백자, 신앙을 포기한 변절자들입니다. 순교자들은 이미 죽었고, 고백자들과 변절자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변절자들에 대한 처리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의 표시만 있으면 다시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고, 변절자들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분열의 양상을 보였고,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키프리아누스는 감독회의를 소집하여 몇 가지를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 증명서를 구입하여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 신자는 조건 없이 교회로 받아들인다.

* 제사에 참석한 자들은 임종 시나 새로운 박해 시기에 회개의 진실성을 보이는 자들은 교회로 받아들인다.

* 그러나 제사에 참석했고 그 후 회개의 모양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없다.

(여기서 제사는 황제 숭배 제사를 말합니다.)

생각보다 느슨해 보이는 감독들의 결론은 앞으로 보게 될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키프리아누스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한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의 성향에 맞는 사람들과 다른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당시의 고백자들에 대한 엄포를 놓았습니다. 변절자들의 교회로 돌아오는 일은 전에도, 그 당시에도, 그 후에도 여전히 논쟁거리였습니다. 중세 시대로 접어들자 교회는 박해는 사라진 반면 회개에 대한 방법들이 고안되면서 소위 고행이 중세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됩니다. 고행은 종교개혁 시대에 들어서면서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배교자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자 아프리카 지역은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기독교인 때문으로 생각하고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러한 황당한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데메트리우스에게><죽음>을 저술합니다. 이곳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흑사병의 원인이 아니며 오히려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위해 자선과 봉사를 베풀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그의 생애 말년에 있었던 이단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한가에 대한 논쟁은 로마교회와 카르타고 교회를 갈라놓는 위기에 빠뜨릴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로마 주교였던 스테파누스는 참회 예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고, 키프리아누스는 터툴리아누스의 영향을 받아 재세례를 주장했습니다. 재세례로 인한 대립은 로마 주교의 순교로 마무리되지 못하지만 현대 기독교는 키프리아누스의 재세례 입장이 아닌 로마 주교 스타페누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257년 키프리아누스는 체포되어 파테르누스 총족의 재판을 받고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다시 소환되어 갈레리우스 막시무스 총독에 의해 재판을 받는 과정에 이교신에 대한 제사를 거부함으로 마침에 순교를 당합니다. 그때가 258914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 키프리아누스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이 책에 속한 그의 저작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세 권의 작품은 키프리아누스를 가장 잘 알려주는 책이라 할 만합니다.


2. 저작해설

-도나투스에게(Ad Donatum)

이 책은 키프리아누스의 최초의 책으로 자신의 신앙 고백서와 같습니다.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246년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나투스는 아마도 자신이 잘 아는 기독교 친구인 것으로 보입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 책 속에서 자신이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기독교 안에 참된 진리와 안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탐욕과 악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서두에서 자신의 회심 이야기를 다룹니다. 6장부터 13장까지에서 당시 로마 제국에 가득했던 이교 사회의 악들을 열거합니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죽어 가고 있네. 사람을 죽이기 위해 경험을 쌓고 연습하고 기술을 연마하지. 이런 극악한 짓이 자행되고 있는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있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더 참혹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극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내용들이 공연되고, 재판장은 돈으로 매수된 거짓 증인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항구가 되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계속하여 경건과 독서와 기도를 할 것을 당부하며 마칩니다.


-가톨릭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

이 책은 키프리아누스에게 가장 중요한 저작입니다. 이곳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catholicae)의 교회 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하나이어야 하는 이유는 교회는 먼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다른 사도들과 같은 사도였지만 베드로에겐 수위권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하나의 교회, 하나의 교좌가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사도가 모두 목자지만 한마음으로 목회하기 위해 그 양 떼는 하나입니다.”(수위권 사본)


그러나 공인 사본에서는 이 부분을 교회의 이러한 일치를 견지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신앙을 보존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교회의 일치는 곧, 진리의 보존이며, 교회가 그 진지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이어야 합니다. 다음 장에서 교회를 경건한 여인으로 묘사하며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자들은 간음한 여자로 묘사하고,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간음한 여자를 택하는 사람은 교회로부터 받게 되는 약속 밖으로 밀려나게 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저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로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방인이 되고 속된 자이며 원수입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습니다.”


이단과 열교, 즉 다른 주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통 교회를 빠져나오는 행위는 진리를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합니다. 예수님의 통옷과 구약의 유월절 어린 양을 한 집에서 먹는 행위, 비둘기의 예를 통해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합니다. 키프리아누스의 교회 일치는 당시 크게 논쟁이 되었던 배교자에 대한 문제와 이단들을 대처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습니다.


-주의 기도문(De dominica oratione)

주의 기도문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의 기도를 해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해설에 그치는 것이 아닐 실용적 기도 안내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주기도문은 성부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합니다. 또한 기도는 하늘의 아버지를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의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일 뿐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죄인은 백성은 하나님의 자식일 수 없습니다. 아들이란 이름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관계의 형성뿐 아니라 죄 사함의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일용할 양식은 육신의 양식과 영적인 양식인 그리스도로 비유합니다. 육과 영은 양식이 필요합니다. 키프리아누스는 구약 속에서 의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로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양식이 주어질 것임을 설파합니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부분에서는 아벨의 순교를 언급하며 주님의 수난으로 끌고 갑니다. 용서하지 않고 시기함으로 형제인 죽이는 것은 순교로도 속량될 수 없는 범죄입니다.


3. 나가면서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키프리아누스는 폭풍 속을 헤치고 살았습니다. 교회가 해결해야 할 산적이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하고, 교인들을 독려하며, 신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교부들이 그랬지만,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교회의 일치와 순수성을 강조했습니다. 터툴리아누스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시대적 상황에 맞게 그것들을 다듬고 수정 보완했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습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그는 온전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교회 일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봅니다. 시대는 그 시대의 위기를 타계할 영웅을 기다리고, 준비된 사람은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드러나게 됩니다. 그는 충분히 예리하지 않았고, 충분히 창의적이지 않았고, 충분히 순교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난해한 문제와 위기를 극복하는데 충분한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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