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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종부 [갈라디아서] 복음의 진수를 읽다

샤마임 2014.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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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화종부 / 죠이선교회

복음의 진수를 읽다


 

복음은 혁명이다. 혁명은 피를 부르고, 피는 생명이다. 그래서 복음은 위험하고, 불편하며, 무례한 것이다.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혁명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목사는 위험한 복음을 설교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화종부 목사의 설교는 바로 그 위험한 복음을 담았다. 김남준 목사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평한다.


한 편의 설교는 설교자의 심장이 진리의 칼로 베이어 흐르는 한 사발의 피입니다.”


복음은 예수이고, 예수는 십자가에 있다. 그곳에서 온 인류를 구원할 시뻘건 피가 흐른다. 로마가 초대교회 예배를 인육을 먹는다는 오해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것, 바로 그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세속적인 모든 가치를 복음으로 평준화 시킨다. 주인과 종이 교회 안에서는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고, 남자와 여자가 담소를 나누고, 사장과 직원이 한 형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복음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맥을 출 수 없다. 복음은 오직 예수로만 통()하는 유일한 진리(眞理). 종교개혁자들이 갈라디아서를 사랑했고, 루터가 갈라디아서와 결혼한 이유는 바로 복음 때문이다.(17)

 

읽는 설교라는 타이틀로 화종부 목사의 갈라디아서가 출간 되었다. 익히 들어 아는 화종부 목사님의 설교 책, 갈라디아서 출간을 환영한다.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김서택 목사님이 개척한 제자들 교회를 섬겼다. 화종부 목사님의 설교를 처음 들은 건, 신대원 개강수련회에서였다. 그때를 회상하면, 청교도를 추종하면서도 고지식하지 않으면서,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설교를 통해 풀어냈다. 삶과 말씀이 격리되지 않은 설교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과 삶의 모순 속에서 갈등하며 찾아가는 일종의 여행이었다. 그 후로, 화종부 목사의 설교를 종종 들었고, 말씀에 인박힌 설교가 큰 울림을 주었다. 이제 그 설교를 책으로 읽을 수 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나 설교를 책으로 내는 것을 싫어한다. 설교와 책은 엄연해 다르고, 달라야 한다. 화종부 목사는 나와 같은 성향의 독자들을 감안한 것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남서울교회에 부임해 온 이후 주일 오전 예배 때 전한 설교를 모은 것’(11)이라고. 또한 녹화 해 둔 것을 거의 수정하지 않은 원형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12). 그래서 반복이나, 문체상 결점이 자주 드러나 보이는 것에 아량을 베풀어 달라고 한다. 빌립보서를 먼저 설교했지만, 갈라디아서를 먼저 출간한 이유를 조국 교회가 아직도 복음과 그 본질에 너무 약함을 보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12)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화목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복음을 더욱 명확하게 하려는 의도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목적이자 화종부 목사의 설교 이유일 것이다. 화종부 목사가 말하는 복음을 뭘까?

 

강해설교이기 때문에 핵심 주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아마 1장에서 그 중심 주제를 드러낸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장에의 주장이 단어와 상황만 바뀌었을 뿐 계속하여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체 주제는 바로 다음 문장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행한 업적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예수의 공로만으로 우리를 은혜 가운데 선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심장입니다. 이 비밀을 알 때, 우리 안에 진실한 변화가 시작됩니다.”(30)

 

갈라디아서는 두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사람은 철저히 무능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오직 예수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는 조건과 자격으로 이루어’(42)있다. 조건과 자격은 인간의 힘으로 쌓은 일종의 스펙이다. 구원은 사람의 스펙으로 불가능하다. 토르토회의는 이것을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고 명했다. 율법이 구원의 근거나 조건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율법은 사람의 약함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불가항력적 은혜로만 가능하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다. 율법의 정죄는 가공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럴 리도 없지만 태어나 단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오늘 죄를 지으면 지금까지 정결한 것과 상관없이 저주를 받는다. 또한 아무리 사소해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면 역시 저주를 받아야 한다. 율법의 역할을 죄를 깨닫는 것이며,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188) 줄 뿐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죽지 않는 한 영원한 정죄아래 있게 된다. 시지푸스의 신화와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은 율법에서 우리를 행방시키기 위함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막히는 것(2:20)이며,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한다.(3:14)

 

성실한 강해자다. 성경 본문을 비약시키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 간다. 전형적인 강해설교자의 모습이다. 만약 저자의 고백대로 이 책이 설교를 거의 수정하지 않았다면 대단한 설교다. 10쪽이 넘어가는 텍스트를 설교 시간으로 따진다면 한 시간은 족히 넘어갈 분량이기 때문이다. 예화도 거의 들어가지 있지 않는 설교는 한 편의 논문에 가깝다. 한 편의 설교를 위해 상당한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행사와 이벤트에 함몰되어 성경에 천착하지 못하는 현대 목회자들에게 좋은 본이 된다. 내용도 충직하게 칼뱅의 후예답게 루터와 칼뱅, 청교도들의 주장들을 충분히 검토하고 설교에 인용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허투루지 않다. 곧고 바르고, 정직하다. 남부중앙교회 김윤기 목사의 추천대로 논문이나 신학적 논쟁을 다루는 난삽한 책보다는, 정확한 주해를 바탕으로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명확하게 풀어냈다.

 

종교개혁의 모토가 무엇인가? 5솔라(Five Solas)가 아니던가. 그 중에서도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는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격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이에 대한 신자의 믿음으로만 구원의 가능함을 확인시켜 준다. 화종부 목사는 충직한 종교개혁자의 후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삶의 중요한 기준은 사도들이 전해 준 진리와 복음입니다. ... 우리의 기준은 초대교회와 종교 개혁과 17,18세기 위대한 부흥의 시대와 오늘날 우리에게 변함없이 동일한 사도적 전승의 진리입니다.”(457)

 

독자들은 이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 가야 한다. 이러한 화종부 목사의 성경 강해는 성경 텍스트에 천착시켜 겉돌지 않게 한다. 그러나 과도하게 본문에 집중한 나머지 사회적 구조와 악의 현상에 대한 통찰은 약하다. 이러한 한계는 근래에 일어났던 세월호 사건 등에 일체 침묵하고 있으며, 노사 문제 등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적용부분에서도 개인에게 한정시키고 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은 장점에 비하면 미미하다. 오타도 보인다. 393쪽에 이 세 가지(시랑, 희락, 화평)’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사랑시랑으로 잘못 쓴 것 같다.

 

즐겁게 읽었다. 말씀은 골수까지 윤택하게 하지 않던가. 보약 한 첩을 먹었으니 마음과 영혼이 든든하다. 혁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의 소명(召命)에 내밀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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