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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샤마임 2014.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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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가나안성도? 웬 뜬금 없는 말인가? 하수상하여 뜻을 물으니 거꾸로 읽으란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성도가 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하나는 '교회를 안가도 성도인가?'라는 질문과, 안나가는 성도를 통해 교회 밖 성도라는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다. 그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의 두 번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1세기에 맞는 시대적 요청이자 변화라고만 치부하게에 왠지 불안하고 어색하다. 교회 밖에도 성도, 즉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 안의 성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직설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면, 굳이 교회를 다니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의존적 신앙을 가진 교회 안 성도들에게 치명적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과장하면, 헌금, 봉사, 예배 참석 등을 하지 않아도 구원 얻을 수 있으며,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탓에 교회가 곧 국가였던 중세나 봉건사회는 안나가 성도의 출현은 불가능했고,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더 이상 가나안 성도를 배타적 시각으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종교적 관용의 시대에, 가나안 성도는 탈권위, 탈근대라는 사회적 현상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제 문제를 조금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탈교회 현상이 두드러지는 현상은 한국이라는 나라에만 일어나는 유일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 " 3세기 교부였던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곧 구원이라는 획일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고,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가 정하는 교회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교회 밖은 곧 성경 밖이고, 이단들을 의미했다. 3세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논쟁으로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교회는 분열되고 시끄러웠다. 이단에 대한 과감하고도 단호한 주장을 감행한 키프리아누스는 결국 다른 주교들로부터 파문의 위협을 받았고, 너무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키프리아누스의 과격함은 당시 일어났던 핍박으로 인한 배교의 문제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가나안성도와는 사뭇 다른 예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앞으로 일어날 교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적 선언이었다.

 

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로마의 멸망은 곧 교회의 기회였다. 로마의 멸망으로 치안과 문화적 공백이 일어나자 교회는 그 공백을 메꾸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회는 교회가 권력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쌓게 된다. 중세는 국가 위의 교회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현재 미국에서 대통령 선언시에 성경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은 중세적 영향이다. 국가는 나라 아래 있고, 교회가 국가의 수장을 결정하는 권력을 쥐게 된다. 카놋사의 굴욕은 국가의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첨예화된 다툼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교회로부터 나가려했고, 결국 영국의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통해 국가 위에 군림하던 교회는 국가 안에, 또는 국가 아래 내려앉는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탈교회화의 현상 중 하나였고 시민정신의 도래, 근대적 정신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시민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지도 구분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 당시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바로 재세례파다. 철저한 자유와 독립을 주장한 재세례파는 부모의 권위를 거부하여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국가의 교회 통치를 또한 거절한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이들은 결국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핍박을 받아야 했고, 시대의 선지자로서의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종교개혁 초기에 루터와 칼빈을 추종하던 재세례파는 개혁자들과 등을 지게 되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지 못한 개혁가들로 인해 핍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기회의 땅이 주어진다. 바로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아메리카로의 이주이다. 미국의 독립은 곧 교회의 독립이며, 관용과 자유의 땅으로서의 자치권을 부여 받게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교회는 시대적 요청에 응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카톨릭에서 교단 중심의 교회인 장로교단이 부흥하게 되고, 현재는 장로교단은 축소되고, 더욱 개교화된 회중교회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오순절교회의 출현과 회중교회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백을 메꾸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조직을 갖추게 된다. 결국 교회는 더욱 탈권위적 현상으로 인해 개교회화, 개인화가 일어난다. 조지 마스던은 그의 책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칼빈주의는, 미국 건국 운동의 기원을 이룬 17세기의 청교도에서, 그리고 대각성 운동 이후 회중주의로부터 분리한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침례교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침례교는 교회를, 회심을 체험한 개개인들의 자발적 협의체로 보는, 개인주의적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중앙 집권화에 대한 반대와, 칼빈주의적 신조주의는 제한을 받는다."(조지 마스던, p235)

 

거두절미하고, 가나안 성도는 탈권위적 시대의 산물이며, 교회는 이제 그 사실은 엄연한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중세적-봉건적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권위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 마치 자신들이 키프리아누스나 되는 것처럼 교회 밖 성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하며, 저주하기까지 한다. 이런 극렬한 반응은 무례한 기독교로의 귀결로 이어진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기독교는 가나안 성도는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가?를 묻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만을 트집 잡아 무례하게 정죄한다.

 

2012년 김진호는 그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들을 재구성한다. 그는 1부에서 한국 교신교회의 과거를 추억하며 '시민 K, 교회에 나가다'를 탐색한다. 2부에서는 한국 개신교회의 오늘을 살피면서 '시민k, 교회를 나가다'를 풀어 간다. 그는 1부에서 '반공주의'와 한국교회의 은밀한 결탁을 추적한다. 현재 한국의 원로? 들은 대부분 월남자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미움과 적의가 있다.

 

"월남자 기독교도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이북신도대표회'의 중심에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가 있었다. 한국 선교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미국 북장로회가 한 목사의 든든한 후견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미국 정계의 보수, 반공주의적 인사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p72)

 

70-80 기하급수적으로 부흥한 한국교회는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물질주의에 빠지고, 한경직 목사를 위주로 한 권력에의 결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뉴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교회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우민화 정책을 추구한 한국교회는 깨어나는 시민정식을 억압한다. 탈권위적 시대에 권위적 목회를 지향한 한국교회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 침몰하기 시작한다. 장년성도에 비해 주일학교 학생수가 200%이상이었던 80년대에 비해, 현재는 고작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교인 고령화가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주일학교 학생이던 이들이 교회의 중직이 되고, 실제적인 일들을 처리하면서 당시의 추억을 되살려 주일학교를 되살리려하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교회는 더 이상 그들을 무지 속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불안해한다. 목회자들은 신처럼 떠받들던 이전의 교회는 탈권위적 사상을 현대 시민들에게는 우격다짐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90년대 이후 드러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성적 타락과 금권주의, 성장주의 등은 교인들에게 더 큰 실망과 아픔을 주었고, 결국 교회 안에 구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적 부조리에 침묵하고, 도리어 권력과 결탁하여 약자를 강제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점점 이웃 없는 종교가 되어 가고 있다. ... 시민 K는 이처럼 신이 된 자본, 자본이 된 신의 사회를 지향하는 교회를 떠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적대적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p175)

 

가나안 성도의 출몰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 교회는 배타적 강제로 가나안 성도를 부정하기를 중지해야 한다. 교회는 이제 가나안 성도에게 물어야 한다. 진지하게,

"당신은 왜 교회에 '안나가'십니까?"

가나안 성도의 출현은 분명 교회의 위기다. 그러나 토인비의 주장처럼 '도전'에 바르게 '응전'하는 것은 새로운 기회이다. 이제 그들은 인정하고, 어깨동무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가나안 성도의 출현은 분명 교회의 위기다그러나 토인비의 주장처럼 '도전'에 바르게 '응전'하는 것은 새로운 기회이다이제 그들은 인정하고어깨동무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교들은 교회로 이끌기 위해서는 배제가 아닌 포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의 한 부분을 언급하고 마칠까 한다. 


"나는 구별과 배제를 구분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이 둘 사이의 분간은 배제와 판단 사이의 구분으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배제하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주체는 어떤 모습일지 알 숭 있게 해준다. 배제에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타자를 기꺼이 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리는 배제하지 않는 판단이다."(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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