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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아에 대한 탁월한 리뷰(김양현 목사)

샤마임 201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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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아에 대한 탁월한 리뷰(김양현 목사)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신작 노아에 대한 말들이 하도 무성하고, 또 어떤 이들의 요청이 있었기에 나도 몇 자 적어 보기로 한다.

우선 이 영화에 대한 단순한 반응을 보니, 처음에 기독교 영화로 알았다가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을 상당히 왜곡하고 심지어 성경이나 기독교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비난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체 관람을 예약했다가 다 취소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불매? 운동까지 불사하겠다는 반응이다.

나는 세 가지 측면에서 노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첫째, 문화비평적 차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시대를 바로 보자는 말이다. 작금의 반응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논리학에서 말하는 바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 argumentum ad ignorantiam)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애초에 기대하는 바가 틀렸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있듯이 '떡 줄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 꼴이다. 생각해 보라. 헐리우드가 우리에게 은혜라도 끼쳐 주길 바랐는가? 극장에서 부흥회라도 할 줄 알았는가? 이미 1970년대에 헐리우드는 교회에 등을 돌려버렸다. 오히려 헐리우드는 교회와 기독교의 적이 된 지 오래다. 헐리우드가 성경을 옹호하고 기독교 복음을 전해주길 바란 것 자체가 논리적 모순인 셈이다.

그럼 헐리우드가 왜 '노아'라는 영화를 만들었을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고? 당연히 아니다. 헐리우드는 10여년 전 부터 어느 정도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소위 영화 제작에 있어 소재가 바닥난 셈이다. 워낙 많은 영화를 제작하다보니 더 이상 만들 거리가 없다. 액션은 진부하고 로맨스는 식상하다. 그러니 헐리우드가 주목하는 것은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진보된 기술과 자본력으로 보다 더 세련된 SF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제임스 카메룬의 '아바타'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과거에 흥행했던 영화들의 리메이크이다. 배트맨 시리즈, 슈퍼맨 시리즈, 그리고 마블 코믹스의 원작들의 리메이크다. 스파이더맨, 아이언 맨, 캡틴 아메리카 등이다. 세 번째 이들이 주목하는 것이 역사물이다. '킹덤 오브 해븐' '알렉산더' 등이다. 기술과 자본이 있으니 얼마든지 대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들이 택한 것이 '노아'라는 영화다. 역사물도 되고 게다가 아직 헌신적인 교인들이 많이 있는 미국과 한국 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인 셈이다. 최근 한국은 헐리우드의 가장 헌신적 구매자다. 최고의 액션 영화를 서울에서 찍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노아'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관심은 흥행이자 돈벌이지 복음에 대한 헌신이 결코 아니다. 그러니 성경과 다르다고 흥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둘째, 감독비평적 차원이다.

노아를 만든 대런 아르노프스키라는 감독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영화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감독의 가치관과 철학이 담기기 마련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의 촬영과 편집에 의한 것이기에 감독의 생각을 담는 것은 당연하다. 대런 아르노프스키가 만든 전작들인 '더 레슬러'나 '블랙스완'를 살펴보면 감독이 어떤 것에 집중하는 지 알 수 있다.

'더 레슬러'와 '블랙 스완'에서 감독이 조명하고자 한 것은 인간 내면이다. 인간의 욕구와 광기, 이중적 심리 묘사에 그는 집중하였다. 특히 나탈리 포트만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뭐 진 '블랙 스완'은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과 광기 그리고 무너져가는 인간심리를 묘사하였다. 백조의 호수라는 발레의 프리 마돈나가 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여주인공의 심리를 잘 묘사하였다. 그래서 제목인 검은 백조, 블랙 스완이다.

그러나 이번 영화 '노아'에서 감독이 집중한 것 역시 당연 노아라는 인물의 심리, 갈등, 광기 아니겠는가? 그것은 명약관화다. 제목이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노아'인 점이 그렇지 아니한가? 애초에 감독은 인류의 심판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수행해야 했던 '노아'라는 인물의 심리적 부담, 그리고 갈등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지, 홍수에 대한 액션을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그러니 액션을 기대한 사람들은 헛물 켠 셈이다.

셋째, 주제비평적 차원이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은 인류의 심판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수행해야 했던 노아라는 인물의 묘사에 집중한다. 그런데 감독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기에, 그는 성경을 더 살피고 연구한 것이 아니라, 고대 홍수 설화등을 참고로 자신의 상상력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불편해 하는 것들이 등장 할 수 밖에 없다. 추방 당한 천사들이 변한 감시자들이나 노아의 가족들에 대한 묘사, 셈과 함, 그리고 야벳이 너무 어린 점 - 성경대로 하면 그들은 이미 장성한 성인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결혼을 다 했지만 영화에서는 미혼의 청소년으로 나온다. 이런 점들은 당연히 성경과 다르다.

그러나 사실 이런 표면적인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감독이 묘사한 전반적인 주제가 '이신론'에 가깝다. 일찍이 토마스 제퍼슨이나 볼테르 등이 창시한 이신론은 하나님은 그저 저 위에 유아독존으로 계실 뿐 인간세계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합리적 이성과 기술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토마스 제퍼슨은 유명한 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을 남겼다. 그들이 표방하는 신은 도킨스가 말 한 바 '눈 먼 시계공'일 뿐이다.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관망한 채 인간에게 맡겨 놓은, 세상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래서일까? 노아라는 영화에서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신다. 노아도 꿈으로 계시를 받을 뿐이다.

더 나아가 영화에서 묘사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놓고 그들이 방종할 때도 전혀 관여하지 않는 무관심한 신이며, 인간의 타락에 대해 무자비하게 심판해 버리는 혹독한 신이다. 두발가인이 '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라고 항변하는 것에서 결국 우리의 타락의 원인도 하나님이라는 것, 노아가 모든 인류는 다 죽어 버려야 한다는 것, 그래서 일리가 낳은 두 손녀를 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강박증을 갖는 것으로 묘사한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상당히 불편하지 않을까 싶다. 당대의 유일한 의인 노아가 손녀를 살해하고자 하다니.. 물론 노아는 신의 뜻을 버리고 손녀들을 구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잔인한데 노아는 사랑이 풍성하다. 하나님이 아니라 노아가 인류를 구원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이신론자들이 주장한 하나님이다. 쉽게 말하면 인류는 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노아'라는 영화에서 건질 것은 없는가? 그럴리가 있겠는가? 우선 감독에게 감사한 것은 우리가 문자로만 읽을 수 있는 노아를 영상화 해 준 것에 감사하다. 물론 감독이 상상력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는 고대 시대를 조금 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카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의 삶의 방식 차이다. 카인의 후손은 도시를 만들고 그 가운데 살아가고, 셋의 후손은 도시를 떠나 광야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가 건져할 할 교훈이다. 노아는 구별된 삶을 살았다. 도시를 떠나 살았다. 폭력과 광기, 살인의 장소를 떠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영화를 통해 얻을 수있는 교훈이다. 구별된 삶, 셋의 자손이라는 정체성,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사명을 묵묵히 수행하는 삶,, 그것은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어쨋든 영화는 영화일 뿐, 은혜는 교회에서 받고, 극장에서는 영화를 즐기면 되지 않을까?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을 버리고, 구별하면 되는 거지 ... 그리고 사실, 노아보다 더 잔인하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화, 드라마가 얼마나 많은가? 관람거부는 그런 영화들에 해야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노아를 볼 것인지 아닌지 묻지 말고 어떻게 볼 것인가 고민하자. 그게 옳은 질문이다.

P.S. 여기서 잠깐.. 설마 실제 노아가 럿셀 크로우처럼 생겼을 것이라 상상하지는 마시라.. 우리가 아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도 실제로 상당히 왜곡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화는 르네상스 시절에 그려졌기에 15,16세기의 유럽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 중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인으로 묘사된다.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워낙 강렬해서 아마도 예수님이 제임스 카비젤 닮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사실 영화가 주는 폐해 중 실제적인 부분이다. 이 영화를 볼 때도 이미지가 주는 영향력, 고정관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지 그것도 미완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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