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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더할 것은 없다 / 앤드류 팔리 / 터치북스

샤마임 201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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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하나님을 만나라

Andrew Farley의

 [복음에 더할 것은 없다(God Without Religion)]를 읽고




벌써 28일 흘렀는데도 아직도 2013년으로 적는다. 일 년 동안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질리 없지만 28일은 너무하지 않는가. 뇌에 장기 기억된 2013년을 지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듯싶다. 이렇듯 죄에 오염된 우리는 철저한 죄의 습관에 매여 새로운 복음과 은혜의 사건을 좋아하면서도 거부감을 동시에 느낀다.

 

오늘까지 지난 주 터치북스에서 출간된 앤드류 팔리의 <복음에 더할 것은 없다>를 다 읽었다. 원제는 God Without Religion으로 종교가 아닌 진짜 하나님’(을 만나라) 쯤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진짜 하나님, 민낯의 하나님을 만나라는 주제로 일관한다. 꾸며지고 덧칠한 하나님이 아니다. 진짜 하나님이다. ‘진짜 하나님이란 구절로 표현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깝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위험한 일인지. 동물원의 우리에 갇힌 사자를 보는 것과 아프리카 초원의 야생 사자를 만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진짜 하나님은 초원을 권위 있게 거니는 야생 사자와 대면과 같다.

 

낡은 방식으로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경계선을 넘으라. 당신이 새로운 언약을 의지한다면 종교라는 낡은 틀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낡은 방식을 버리면, 죄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힘을 잃어버린다.”(41)


아직도 생생한 하나의 기억이 있다. 성경을 읽다가 생각 외로 모순과 모호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이런 모순을 들추어 낼까봐 겁이 났다. 성경을 까발리면서 거짓말이라고 폭로?할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감추고 싶었다. 어느 날 같이 하숙하던 형이 성경에 대해 물었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던 성경의 모순을 조목조목 들추어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화를 내면서 아니라고 억지를 부렸다.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성경을 더 깊이 읽으면서 두려움은 잘못된 생각에서 일어났음이 드러났다. 나는 성경을 변호할 필요가 없었다. 성경은 성경을 변호하지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드러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는 입에 담기 부끄러운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의 부끄러운 행위를 하는 것, 롯이 자의 두 딸과 교합하는 것을 비롯하여 차마 이런 것까지 적어야 하나 싶은 이야기가 한 두 곳이 아니다. 그런데 나의 염려와 다르게 성경은 너무나 덤덤하게 기술한다. 감추고 싶은 마음이 없다. 심지어 어떤 곳은 더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 다윗은 밧세바에게서라고 적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라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좋은 점만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성경도 그렇게 해야 옳다. 그런데도 성경은 일부러 믿음의 선조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안티크리스찬들이 성경을 19금으로 지정하자는 운동이 결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민낯이다. 숨기지도 감추지도 않는다. 성경은 민낯의 하나님을 찾으라 말한다. 복음이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인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의 이야기에서 거룩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들 보다 창기와 세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한다. 경악할 일이다. 자기 몸을 팔아 살아가는 부정한 창기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은 위험하다.

 

복음은 외줄타기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똥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가진 출생, 그동안 쌓아온 거룩한 행위와 헌신, 앞으로 이루어가야 할 수고는 쓰레기다. 오직 믿음만이 전부다. 저자는 이것을 율법에 근거한 죄의 능력’(159)이라고 말한다. 죄의 관성이 지배하는 거듭난 우리의 삶은 죄를 완전히 떠나 살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십자가는 죄를 대신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죽었다. ‘구원의 때에 십자가에서 집도된 수술은 죄와 우리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159). 복음은 얻는 것이 아니라 향유하는 것이다. 향유할 수 없는 복음은 우상숭배이다. 그것은 종교요 율법이다. 복음은 자기 의()에 안주하려는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과감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생명을 담도로 하는 외줄타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무섭지 않니?” “아니요 아빠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저는 아버지를 믿는걸요.” 그렇다. 복음은 아버지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행위다.

 

 

일사부재리의 원칙(一事不再理, double jeopardy)에 의하여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 바로 이점 때문에 복음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은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성도들에게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율법을 강조한다.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외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 죄들을 도말하신 후에 우리가 다시 심판을 받는다면 이것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다.”(228) 얼마나 혁명적인가. 교회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이들이라면 이 논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단언한다. 결코 다시는 정죄는 없다. 다시는.

 

다만, 아직 성령의 법에 익숙지 않아 아직도 2014년이라고 적지 않고 2013년이라고 적을 뿐이다. 노예가 해방되어도 역시 노예근성에서 쉽게 벗어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노예가 아니다. 자유인이다. 자유인! 복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했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변환 시켰다


앤드류 팔리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DrAndrewFa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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