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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목사들이여 교인들을 떠나 보내라

샤마임 201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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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목사들이여 교인들을 떠나 보내라

 

목사의 뜻을 사전에서 찾으면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 1) 예배를 인도하며 신도들에게 교의를 가르치는 성직자, 2)고려와 조선 시대,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인 목을 맡아 다스리던 정삼품의 외직. 둘은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을 말하지만 어떤 의미, 즉 백성과 교인을 다루는 의미에서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자를 보면 기독교의 목사는 牧師 이고, 행적목사는 牧使이다. 두 글자를 뜻은 앞의 목 牧에 있다. 기능적으로 양을 치는 사람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나 기독교에서는 백성들을 '양'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를 '목자'로 치환시켜도 될 것이다. 목사의 본질이자 사역의 최우선 순위이며, 어떤 것으로도 물러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는 양을 돌보는 것이다. 이것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난다면 목사는 더이상 목사가 아닌 것이다. 

 

 

 

 

일 만하는 현대교회의 목회자들

 

현대교회는 목사의 임무가 다양하고 기능적 차원이 예측하기 힘들만큼 확장되었다.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구하는 조건을 보자. 기독신문에 나온 실제광고이다.

① 총신대신대원, 대신대신대원졸업 ② 찬양인도 가능하신분 ③ 12인승 운전가능하신 분 

 

일반교회에서 교역자를 구하는 조건을 보면 일반적으로 믿을만한 신학대를 다녔고, 찬양이나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어떤 교회는 워드작업과 음향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은 우선채용한다. 이것은 목사의 기능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일반교회에서 이러한 목회자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교회가 본질에서 그만큼 멀어진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보기엔 '그렇다'이다.

 

목사는 영적지도자이다. 영적지도자의 조건은 영적 가르침을 잘 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목회자를 구하는 최우선순위여야 한다는 점이다. 목사는 먼저 성경에 능통해야하고, 영적 모범이 되어야 하고, 가르침에 탁월한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회자의 본질이자 주기능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목사가 그러한 것만으로본 부족하다. 아니 그것은 잘 못해도 된다. 설교를 잘 못해도, 성경을 잘 가르치지 못해도, 심방을 잘 못해도 된다. 찬양 잘하고, 워드 잘다루어 보고서를 잘 만들면 된다. 음향기기까지 잘 만져 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이것은 목회가 아니다. 이것은 그냥 '일'이다. 이러한 것들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우선순위가 바꿨다는 것이다. 먼저 잘해야할 것과 그다음 잘해야 할 것이 바뀐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은 교회의 일과 목회를 함께 했다. 그러다 교인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자 소수의 사도들이 감당하기에 불가능하게 된다. 이때 사도들은 온교인들에게 너희 중에서 일꾼을 뽑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가르침에 전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집사의 기원이다. 집사는 말 그대로 '일하는 사람'이다. '일'도 목회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사역은 아니다. 사도들은 가장 중요한 사역을 먼저 감당하고 덜 줄요한 사역을 집사들에게 위임한 것이다. 이로인해 교회는 대형화 속에서도 본질을 잃어 버리지 않고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목회자가 집사의 일까지 감당하게 되었다. 일반교회에서 교역자들이 차 운전을 하고, 교회 청소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교회의 행사시에 사회와 여러 일을 해야할 뿐 아니라 뒷치닥거리까지 해야 한다. 말그대로 일꾼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진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일까?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말은 사도들처럼 목회자가 목양도하고 일도하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 교인들은 어린아이처럼 다루어도 되는 것일까? 수십년이 지나도 목회자가 기저귀 갈아주고 밥을 먹이는 것이 옳은 일일까? 과연 그럴까?

 

진정한 목회는 위임에서 시작한다.

 

풍성교회의 김성곤 목사는 자신의 목회 사역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를 '위임'이라고 했다. 평신도를 살리는 목회를 위해서는 위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고인이된 전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는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책에서 평신도는 없다라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굳이 '평신도'라 한다면 목회자 아닌 사람이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말은 지금까지 목회자들이 평신도로 하여금 일을 맡겨지 않고 목회자들이 '다' 했다는 말이다. 평신도를 미숙한 어린아이 취급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평신도를 깨우는 평신도로 하여금 다시 초대교회 집사들이 했던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원래의 일을 맡기는 것, 즉 '위임'이야 말로 유효한 목회의 표본인 것이다.

 

위임이 왜 목회인가?를 생각해 보자.

 

위임은 나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도록 책임을 떠 넘기는 것이다. 정치사전은 '이양'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다른사람에게 책임을 지게하는 것이 왜 목회인가? 위임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책임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 어린아이들이 자라나면 반드시 그들에게 집안일을 나누어 시키라고 양육 전문가들을 조언한다. 아이들이 집안일을 도움으로 자신이 가족의 일원임을 배우게 되고 헌신을 통해 가족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경제학에서도 '매몰비용'이란 것이 있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자신이 투자한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지기 때문에 전에 투자한 것에 대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업이 망하게 되어 더이상 투자하면 안 된다는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아까워 잘못된 선택을 계속하게 된다. 부정적인 의미로서 매몰비용의 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를 건져보자.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 큰 분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 때 교회를 쉽게 떠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제대로 섬기지 않았던 '들러리 신자'들이었다. 교사로 봉사한 적도 거의 없고 헌금은 더더욱 하지 않았던 이들이다. 발만 살짝 담갔던 그들을 교회가 시끄러워지자 '내가 이 교회에 무엇 때문에 남아 있어야 하느냐?' 의문을 제기하며 그만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에 대한 애착이나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절대적 헌신은 절대적 사랑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는 우리가 듣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본 회퍼는 이러한 주님의 제자로의 부르심을 '제자가  되는 것은 그(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죽음을 요구할까? 적당히 따라오라하면 안 될까? 주님은 인간을 너무 잘 아시는 분이다. 그래서 절대적 헌식이 절대적 사랑임을 알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목회자들이 평신도들에게 위임해야하는 명분과 이유가 분명해 진다. 평신도들이 믿음의 수준을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게 하려면 그들로 하여금 '일'하게 해야 하고, 자신의 수고 노력으로 교회가 세워져가는 것을 목도해야 한다. 일한만큼 사랑하고, 사랑한 만큼 일한다.

 

목사들이여 교인들을 떠나 보내라.

 

자, 어떤가? 평신도들에게 위임해야 하는 이유가? 나는 적어도 목회자들이 올바른 목회를 하고자 한다면, 부모가 자식을 결혼을 통해 떠나 보내듯 목회자들도 평신도들을  떠나 보내야-독립적인 존재로 세워주어야 하다고 굳게 믿는다. 언제까지 교인들로 하여금 어린아이로 있게 하려는가? 이제 떠나 보내라. 그러면 자랄 것이다. 광야의 들꽃처럼, 초원의 야생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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